경계에서 태어나는 미학

- 김순남의 궤적을 따라서

 

김순남(金順男, 1917-1986)은 한국 음악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궤적을 남긴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일제강점기 도쿄음악학교에서 체계적인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선구적 인물로, 해방 직후에는 ‘건국행진곡’ 등 해방공간의 시대정신을 노래하며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1948년 월북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남한에서는 금기와 망각의 이름이 되었고, 북한에서도 체제 변화 속에서 점차 잊혀졌다.


김순남. 이름을 보고 어떤 멜로디가 떠오르는가? 대부분은 침묵일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조선인 중 최초로 체계적인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해방 직후 거리에서 울려 퍼진 〈건국행진곡〉의 작곡가가 이렇게 철저히 잊혀져 있다는 것이.

 

김순남의 '지워짐'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역사의 불편한 진실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근대화의 모순, 해방공간의 이념 갈등, 분단의 비극까지. 김순남이라는 한 개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복잡하고 모순적인 지점들과 마주하게 된다.

 

1936년, 도쿄음악학교의 연습실. 19세의 김순남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한다. 완벽한 터치, 정확한 박자. 일본인 교수들도 감탄할 정도의 실력이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선율 뒤에는 잔혹한 논리가 숨어 있었다.

 

당시 일본에게 서양 클래식 음악은 '문명'의 상징이자, 제국주의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도구였다. 그리고 그 '문명'은 식민지 조선에게는 오직 일본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이 말 속에는 '음악의 보편성'이라는 달콤한 포장지 안에 '일본 제국의 우월성'이라는 독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은 '비문명국'이었고, 조선인이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일본의 매개가 필수적이라는 교묘한 메시지였다.

 

여기서 식민지 근대성의 핵심적 모순이 드러난다. 조선인이 '근대인'이 되려면 서양 문물을 배워야 했지만, 그 유일한 통로는 식민 지배자인 일본이었다. 김순남에게 서양 음악은 해방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굴종의 증거였다. 그는 베토벤을 연주하며 자유를 꿈꿨지만, 그 베토벤은 일본어로 해석된, 제국의 문법에 갇힌 베토벤이었다.

 

김순남은 이 모순의 한가운데서 자신만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서양 음악의 형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에 조선의 혼을 담으려 했다. 서양의 화성법과 구성 원리를 배우면서도, 조선 민요의 선율과 정서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해방 후에는 '친일'의 굴레를 씌우는 근거가 되었고, 월북 후에는 '부르주아적 잔재'로 비판받는 빌미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통으로 직면했던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다. 계몽과 친일 사이의 줄타기. 김순남은 이 줄타기를 음악이라는 언어로 수행했다. 그의 건반은 제국의 음계를 연주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조국의 멜로디가 꿈틀거렸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하지만 김순남에게 해방은 또 다른 시험의 시작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거대한 파도였다. 일본에서 약 6~7년간 수학하고, 일본인 교수들의 추천을 받았으며, 제국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성장한 그의 이력은 명백히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순남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했다. 그는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1945년 말경, 그는 좌익 성향의 음악가들이 모인 조선음악가동맹에 참여한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미션을 받는다. '민족 해방의 음악'을 만드는 것.

 

그의 음악은 더 이상 개인의 예술적 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선동의 도구이자, 민족 해방의 메시지였다. 해방 직후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김순남의 「건국행진곡」이 널리 불렸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모순이 발견된다. 김순남은 '민족 음악'을 만들면서도 여전히 서양 음악의 형식을 고수했다. 행진곡의 4/4박자, 서양식 화성법, 관현악 편성. 이는 당시 조선에 '민족 음악'이라고 할 만한 근대적 형식이 부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 음악으로는 수만 명이 모인 광장에서 집단적 열광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김순남의 선택은 현실적이었다. 서양 음악의 강력한 형식미를 빌려 조선의 현실을 노래하는 것. 하지만 이런 그의 음악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은 복잡했다. 우익에서는 '좌익의 선동가'라고 비판했고, 좌익 내부에서는 '부르주아적 형식'이라고 문제 삼았다. 김순남의 음악은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이미 '경계인'의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다.

 

이 시기 김순남이 보여준 것은 '대중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그는 항상 '모든 사람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을 추구했다. 이는 도쿄에서 배운 고급 클래식 기법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건국행진곡〉의 경우, 화성적으로는 정교하지만 선율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단순하게 만들어졌다고 평가된다. 이는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였다.

 

김순남은 '어려운 것을 쉽게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복잡한 서양 음악 이론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내는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바로 이 능력이 그를 더욱 위험한 존재로 만들었다. 대중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가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1948년, 김순남에게 운명의 해가 밝았다. 남한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었고, 좌익 문화인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다.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등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이어졌다. 김순남의 〈건국행진곡〉은 좌익 집회에서 자주 불렸고, 그 자신도 조선음악가동맹의 핵심 멤버였다. 경찰의 수사망이 그에게 좁혀오고 있었다.

 

1948년 8월경, 김순남은 가족들에게 “이북으로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향했다.

 

평양에 도착한 김순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뜨거운 환영이었다. 북한 당국은 그를 '남조선에서 온 인민 예술가'로 홍보했다. 그는 평양음악대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북한의 주요 음악 기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삶은 그가 기대했던 '자유로운 음악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한의 예술 정책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인민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목적을 가져야 했고, '당의 노선'에 무조건 부합해야 했다. 김순남의 개인적 취향이나 예술적 실험은 허용되지 않았다.

 

1950년대 들어 김순남은 북한 체제에 맞는 다양한 작품들을 작곡하며 체제 음악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흥미로운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여전히 서양 음악의 형식 논리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소나타 형식, 변주곡 기법, 대위법적 전개 등의 흔적이 그의 작품들에서 발견된다. 둘째, 그는 조선 전통 음악의 요소들을 나름대로 활용하려 했다.

 

1960년대 들어 북한이 '주체사상'을 본격적으로 내세우면서, 김순남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주체음악론'에 따르면, 진정한 조선 음악은 조선의 전통에 기반해야 하며, 서구 음악의 형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사대주의'였다. 하지만 김순남에게 서양 음악은 단순히 '외래 문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30년 이상 체화해온 언어와 같았다.

 

결국 김순남은 타협을 선택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주체음악론을 따르면서도, 실제 작품에서는 자신이 익숙한 음악 기법들을 교묘히 활용했다. 이것은 일종의 '이중 언어' 전략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예술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시도였다.

 

김순남의 진짜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남북 양쪽에서 모두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남한에서 김순남은 월북한 순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었고, 그의 이름은 음악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해방 직후 많은 사람들이 불렀던 〈건국행진곡〉마저 '금지곡'이 되었다. 이런 지우기 작업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부터 발행된 한국음악사 관련 서적들에서 김순남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있더라도 "월북한 작곡가"라는 한 줄의 낙인이 전부였다.

 

북한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주체사상이 강화되면서, 김순남의 일제강점기 경력과 서양 음악 교육 배경은 '부정적 유산'으로 취급되었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강조되면서, 일본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은 '순수하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다. 북한에서 발행된 음악사 관련 자료들에서도 김순남의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었고, 그의 초기 작품들은 '부르주아적 잔재'로 평가절하되었다.

 

이러한 '이중 망각'은 분단 체제가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의 상징이다. 분단은 복잡한 현실을 '우리 편'과 '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김순남 같은 인물은 본질적으로 '경계인'이었다. 그는 조선과 일본, 전통과 근대, 예술과 정치, 남한과 북한의 경계에서 살았다. 하지만 분단 체제는 그런 복합적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순남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형식과 내용의 변증법'을 파악해야 한다. 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내용을 담았지만, 형식적 측면에서는 일관된 특징을 보였다. 도쿄 시절부터 북한 시절까지, 그의 음악에는 서양 음악의 형식 논리가 일정 부분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극적인 변화를 보였다. 1930년대에는 '조선적 정서'를, 1940년대에는 '민족 해방'을, 195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 건설'을 노래했다.

 

흥미로운 점은 김순남의 음악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변주'되는지다. 비슷한 음악적 기법과 구성이 다른 가사와 만나면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음악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음악은 그 자체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만, 그것이 놓이는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이토록 철저히 잊혀진 김순남을 다시 소환해야 하는가?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가장 깊은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다.

 

김순남의 삶은 한국 근대성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의 궤적을 통해 우리는 근대화가 단순히 '서구화'가 아니라, 식민지적 조건과 이념적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문화적 번역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근대성은 서구에서 완성된 형태로 수입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변형되고 재구성된 것이었다.

 

만약 김순남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마 그는 유튜브에 채널을 열고 "클래식 편곡으로 만나는 한국 민요"라는 제목으로 영상을 올렸을 것이다. 댓글에는 "이게 진짜 한국적인 건가요?" "너무 서양적이지 않나요?"라는 논쟁이 벌어지겠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경계에서만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는 것이 김순남의 미학이었으니까.

 

김순남의 실험은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남북 양쪽에서 모두 잊혀졌고, 그의 음악은 이념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졌다. 하지만 실패한 시도라고 해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실패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다.


 

김순남은 경계인이었다. 조선과 일본, 전통과 근대, 남한과 북한, 예술과 정치의 경계에서 살았다. 그리고 바로 그 경계성 때문에 어디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 반드시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김순남의 음악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경계적 시각이다. 서양과 동양, 전통과 근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새로운 가능성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김순남을 특정한 이념적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복합적인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 근대사의 복잡성과 모순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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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복기와 그것을 넘어선 가능성 사이에서